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발단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Map_Crusader_states_1135-en.svg.png|width=100%]] || || 2차 십자군 전쟁 직전 레반트 지도 ||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에 이어 멜리장드 여왕과 풀크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보두앵 2세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물론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자리도 물려받았는데 안티오키아는 너무 오랫동안 섭정과 부재자들의 지배를 받았고 따라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주변의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는 상황에 그건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예루살렘 왕국은 안티오키아에 강력한 통치자를 새로 앉혀야 했다. 풀크는 안티오키아의 전 지배자인 보에몽 2세의 9살 된 딸 [[콩스탕스]]를 34세의 푸아티에의 레몽과 결혼시켰고 레몽을 안티오키아의 지배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에 예루살람과 이웃하고 있던 군벌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세력이 날이 갈수로 강대해졌다.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총독)였던 장기는 그 시점에선 다마스커스 정복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성전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장기가 [[십자군 국가]]들의 경계에 닿는 것을 경계한 풀크는 다마스커스와 연합하여 장기의 다마스커스 공략을 분쇄했지만 알레포와 모술을 지배하는 장기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남쪽에선 아스칼론의 [[이집트]] 군대가 주기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구호 기사단과 여러 십자군 기사들이 성채를 세우고 예루살렘 왕국 남부의 방어를 맡았다. 이때 세워진 요새 중 하나가 유명한 [[크라크 데 슈발리에]]다. 1143년에 풀크 왕이 낙마 사고로 죽고 멜리장드가 단독 통치자로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예루살렘의 왕위 교체와 십자군 국가들 간의 관계 악화를 장기는 놓치지 않았다. 1144년 11월 말 장기는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다. 하필 에데사의 지배자인 조슬랭은 주력 군대와 함께 텔바시르에 있었다.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은 조슬랭의 도움을 거절했고 멜리장드가 급히 보낸 원군은 너무 늦게 도착했을 뿐더러 수가 너무 적었다. 12월 24일에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를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였다. 제일 먼저 수립된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작국]]은 그렇게 사라졌고 안티오키아는 강력한 완충지대와 투르크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방벽을 잃었으며 이슬람 교도들은 십자군 국가를 영원한 이웃이 아니라 언젠가 없애버릴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